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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der 40+ / 한국의 건축가들Ⅸ_오후건축사사무소
고집하지 않는 자세
오후(OHOO)가 지향하는 건축 디자인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아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디자인 결을 묻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특정한 형태의 조형 방식, 또는 재료 적용이나 구축의 스타일 등 그와 관련된 고집은 지양하고자 한다. 그 대신 매번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편견 없는 시각으로 땅을 바라보고, 건물이 지어진 후 생겨날 이야기를 생각하며, 아이디어를 떠올리곤 한다. 마치 재료 본연의 맛을 그대로 살려 요리하는 것처럼 순수한 시각으로 대지의 특성, 주변과의 맥락이나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관찰하며 작업에 힘을 더해줄 실마리를 찾는다. 그 와중에 우리 건물이 기억될 요소 또는 어떤 포인트가 무엇일지를 떠올리며 하나씩 빚어 나간다.
고집하지 않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오랜 시간 동안 다져온 자신만의 방식은 익숙함 속에서 가장 효과적인 결과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자신의 작업에 대한 깊은 애착과 확신 그리고 자부심은 스타일을 고수하려는 의지로 이어지고, 때로는 그것이 뻔뻔할 정도로 견고한 욕망이 되기도 한다. 진정한 창조란 그 고집과 집착을 넘어서려는 순간에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익숙한 방식에 머무르지 않으려 하며, 고집하지 않는 자세를 취하려 노력한다.
더불어, 우리는 목적과 역할이 불분명한 디자인적 요소는 최대한 배제하려 한다. 디자인의 본질과 의도가 흐려지지 않도록 고민하며 공간에 서사를 입혀 간다. 사람들에게 명확한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면, 공감을 얻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매 순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디자인을 정제하려 한다. 그래서 늘 ‘왜’라는 자문이 뒤따르고, 그 과정속에서 디자인을 다시금 가다듬는다. 끊임없는 고민과 질문을 통해 공감을 자아내는 건축이 우리가 지향하는 작업의 방향성이 아닐까 생각하며 매 프로젝트를 이어나가고 있다.
이야기로 채워지는 공간
그림을 감상할 때, 사물의 정적인 모습을 담은 정물화보다는 사람들의 생동감 넘치는 감정과 행동을 담은 풍속화에 더 눈길이 간다. 그런 그림을 볼 때엔 마치 그 안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으려는 듯이 오랜 시간동안 관찰하게 된다. 단순 미적인 완성도와 아름다움을 넘어 사람들의 이야기와 감정이 전달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생동감 있는 이야기는 공간을 채우고 깊이를 더하는 힘을 가진다.
건축도 마찬가지이다. 기능에만 집중한 효율적인 건물보다는 이야기가 담긴 공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간은 본래 무의미한 장소이지만, 그 안에 이야기가 깃들어질 때 비로소 장소로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경험된다. 결국 우리가 담아내는 이야기 있는 공간 계획이 장소로서 기능하기를 바라며 작업에 임하는 것이다.
또한, 장소로서 경험할 수 있는 건축은 내부 공간으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외부에서부터 자연스럽게 내부로 이어지는 연쇄적인 경험이야말로 건축의 본질을 이룬다. 동네 길을 따라 대지 입구로 들어서고, 도로를 따라 진입하는 마당을 지나 현관을 거쳐 실내로 이어지는 연속된 프레임은 마치 필름처럼 펼쳐진다. 어떤 풍경을 마주하고, 어떤 공간을 체험하며, 어떤 분위기를 느끼게 될지,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는 여정과 같은 셈이다. 그래서 매 순간 어떤 이야기로 채워나갈지 고려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라 생각이 든다.
땅을 바라보는 시선
굵직한 선이 잘 드러나는 우리나라 땅은 지역마다 지형의 특색이 도드라진다. 그렇기에 다양한 위치의 대지를 접할 때마다, 그 땅이 가지고 있는 고요한 면모를 하나씩 읽어가는 재미가 있다. 향, 지형적 특성, 사회적 맥락, 시각적 환경 등 어느 하나 똑같지 않고, 땅마다 가진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가끔 우리가 진행했던 특정 프로젝트의 외관을 똑같이 지어달라는 생뚱맞은 요구를 하는 건축주를 만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땅에 맞는 설계를 고려해야 하는 이유와 고유한 각 대지에 따라 건축의 태도 또한 달라져야 함을 차근차근 설명하며, 땅이 가진 고유한 특성에 대해 강조한다.
땅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은 단순한 분석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땅이 지닌 본래의 특성과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건축적 언어로 풀어내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땅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고유한 이야기에 집중함으로써 장소의 정체성과 의미를 담은 공간을 만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결국, 땅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과정이야말로 건축의 시작이며, 장소에 뿌리를 내린 공간을 만드는 중요한 출발점이라 생각한다.
손끝에서 시작되는 작업
빠르게 변화하는 AI시대, 모델링 작업과 렌더링 프로그램은 날로 정교해지고 있다. 몇 번의 클릭만으로 현실과 유사한 가상의 공간을 구현할 수 있으며, 조명과 재질의 미묘한 차이까지도 손쉽게 조정할 수 있다. 이러한 첨단 기술의 환경 속에서 손으로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마치 낡은 방식을 고수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모형 작업을 중요하게 여긴다. 디자인한 공간을 직접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확인하는 과정은 계획만큼이나 중요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모형을 통해 계획된 공간의 비율을 체득하고, 고려해야 할 디테일을 되짚어보기도 하며, 새로운 통찰을 얻기도 한다. 또한, 모형은 직관적인 관찰을 가능하게 하여, 공간을 이해하고자 하는 건축주에게도 효과적인 설명 도구가 된다.
손끝에서 시작된 건축의 감각은 우리에게는 디지털 기술이 제공하는 가상 이미지 이상의 의미가 있다. 도면 위의 선들과 가상 이미지 속 시각적인 현상으로만 인식되던 것이 실제 구축 단계를 거치면서 볼륨을 형성하고, 재료 고유의 질감이 더해지며 비로소 공간이 된다. 이는 우리가 모형 시뮬레이션을 하며 수없이 고민하고 반복한 과정과 같다. 그렇기에 디지털 기술이 제공하는 수많은 가능성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손끝에서 시작되는 물리적인 경험이 공간을 이해하고, 구축하는 과정에서 본질적인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좁은 골목길에서 색다른 시선
빠른 산업화와 도시화가 이끄는 급격한 변화 속에서 늘어나는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좁은 골목 상권은 제한된 공간을 세밀하게 나누며 확장되었다. 그 결과, 각 필지와 건물 사이에 여백을 느끼기 어려운 답답한 도시 환경이 형성되었다. 좁은 골목길은 여유를 느낄 수 있는 공간도 부족하지만, 각 필지 마저 작아 건물과 대지 틈에 조금의 여지를 느낄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상암동은 미디어 산업의 중심지로서 대규모 빌딩과 열린 공지들이 조화를 이루며 개방적인 도시 구조를 자랑하지만, 좁은 골목 상권이 함께 자리 잡아 상반된 매력을 가진 독특한 지역이다. ‘REDHOLE’ 역시 작은 필지들이 밀집한 골목의 한 켠에 자리하고 있다. 20평 남짓의 작은 땅은 한 층이 10평도 나오지 않은 곳이다. 이 좁은 공간에서 어떤 방식으로 풍경을 전환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시작했다.
좁은 골목 상권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루프탑 카페와 바는 사람들에게 시각적 변화를 통한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이와 같은 밀도 높은 도시 환경에서 높낮이에 따른 시각적 차이는 풍경을 변화시키는 요소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골목의 수평적 흐름을 수직적으로 전환하여, 기존의 협소한 공간에서 벗어나 새로운 풍경을 제시하고자 했다. 또한, 건물의 주된 색과 대비되는 계단 동선의 붉은 색은 변하는 풍경의 전환을 강조하며 공간감을 더욱 부각시켜 계획했다. 동선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여유 공간은 각 층의 테라스 역할을 더불어 하며, 시각적 변화와 함께 더욱 개방적인 공간감을 제공한다. 이처럼, 골목 틈에서 작은 공간은 단순히 여유를 제공하는 차원을 넘어, 감각의 변화를 일깨우며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쉼’을 위한 공간적 해석
휴식 공간은 머무르는 실내 공간의 안락한 환경뿐 아니라, 주변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외부에서 내부로 이어지는 연쇄적인 경험은 가빴던 호흡을 가다듬는 과정과도 같다. 길을 따라 펼쳐지는 풍경과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시퀀스는 공간에 대한 기대감과 편안함을 서서히 쌓아가며, 방문하는 이들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고자 했다.
대지는 주변 산세가 마치 땅을 포근히 감싸는 듯한 인상을 주는 곳이다. 등고에 따라 땅의 높낮이가 형성된 대지에 자연스럽게 휴식 공간과 관리 공간을 분리하고자 했다. 높은 대지에는 휴식 시설과 여가 시설을 배치하여 쉼의 공간으로 활용하고, 낮은 대지에는 사무실과 창고를 두어 관리 기능이 효율적으로 수행되도록 배치했다. 이와 같은 배치를 통해 휴식을 취하는 이들은 주변 풍경을 방해 없이 한눈에 조망할 수 있게 된다.
마을의 길을 따라 자리한 연수원은, 차에서 내려 휴식 시설로 걸어서 진입하도록 유도한다. 휴식 시설로 가는 길은 산세를 따라 마당을 둘러 가도록 길을 우회하여, 건물로 향하는 여정도 휴식의 일부임을 알려주고자 했다. 마음을 정돈하고 휴식의 공간으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 과정과 같다. 이 길을 따라 마주하는 주변 산세와 건물 사이의 틈으로 보이는 풍경은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로 하여금 시간적 여유를 되찾을 수 있게끔 하며 온전한 휴식을 느낄 수 있도록 돕는다.
여유 있는 식사
‘여유 있는 식사’란 무엇인지, 그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어느 교내식당이든 여유를 찾긴 쉽지 않다. 대부분 고개 한번 들지 않고 식사를 서둘러 마치는 사람들과 바쁜 발걸음으로 다음 일정을 향해 떠나는 이들이 교차하는 곳이다. 테이블 간격이 넓어 물리적인 여유가 있는 곳도 있지만, 낮아진 공간의 밀도엔 여유가 아닌 긴장감 또는 익숙한 서두름이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듯하다. 결국, 식사하는 공간의 여유로움은 그 행위에 비례하지 않는 것이다.
전창으로 시야가 넓게 확장되며, 옥상 테라스 너머로 주변 동네 풍경까지 관찰할 수 있는 곳이라 위치적인 매력이 있었다. 기존 공간이 가지고 있는 매력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식사 공간은 외부와 밀접한 자리에 배치했다. 주방을 중심으로 외부와 맞닿은 공간은 식사를 위한 곳으로 비워두고, 시선이 자연스럽게 밖으로 확장되도록 유도했다. 이는 내외부의 경계를 흐리게 하고, 풍경의 연속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이다.
재료의 적용 질서와 세밀도에 따라 공간의 속성은 달라진다. 중앙에 배치된 주방은 무거운 볼륨으로 하고 석재와 같은 중량의 마감재를 적용해 공간의 밀도를 높였다. 반면 식사 공간은 잘게 나눠진 요소와 목재 등 경량의 마감재를 적용해 밀도를 낮춰, 외부로 팽창하는 듯한 공간감을 형성했다. 더불어 내부에서 외부 처마까지 이어지는 목재 루버의 연장은 시각적 연속성을 더하게 된다. 식사 도중 자연스럽게 바깥의 풍경과 자연의 모습을 관찰하는 여유를 가지게 된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바깥 자연을 감상하고, 계절과 날씨의 변화를 느끼며, 각자의 속도와 방식으로 여유를 즐기는 교내식당이 되길 기대한다.
주거 변화의 시도
공공임대주택은 80년대부터 우리나라 주요 주거 복지 정책으로 국민의 주거 안정을 위해 우리 사회에 급속히 공급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거주민들의 삶의 질과 건축의 다양성에 대한 다채로운 시도 또는 고민이 충분히 고려되었는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인구 감소가 논의되는 사회적 시기상 공공임대주택의 공급 호수보다는 다양한 삶의 형태와 의미를 반영할 수 있는 새로운 유형에 대한 고민이 논의되어야 할 것 같다.
청주교대를 마주한 대지는 대로변에 위치해 있고, 주변에는 저층 밀집 주거지가 형성되어 있어 공공주택이 들어섰을 때 건물에서 바라보는 도시 풍경에 넓은 시각적 개방감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저층 주거지 입장에서는 공동주택의 큰 볼륨감이 위압감이나 단절감을 줄 수 있기 때문에, 기존 마을 조직과의 연계를 고려한 수용적인 태도의 주거시설을 계획하고자 했다.
주거 블록을 분절하고 분산 배치하여 입체적인 열린 볼륨을 형성하여, 탁 트인 주변 도시 경관을 실내로 끌어들인다. 또 저층 중심부에는 열린 마을마당을 계획해 대지를 관통하는 마을 길이 마을마당으로부터 연결될 수 있도록 했다. 최소한의 담장조차 설치하지 않은 열린 대지 경계를 통해 마을주민 누구나 이 마을 길을 걸으며 마을마당에서 각자의 일상의 이야기를 쌓을 수 있길 바랬다. 마을 마당에서부터 수직적으로 연결된 주거시설의 옥외계단, 개방된 각 층 복도에서의 시각은 마을 마당으로 향하며, 마을 주민간 다양한 시각적 교차가 이루어지는 활성화된 마을조직을 형성한다.
최근 공동주택은 안전과 보안이라는 이유로 지역사회와 단절된 섬처럼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청주수곡 행복주택은 기존 도시 조직과 경관을 배려하고, 마을과의 연계를 통해 커뮤니티와 프라이버시 사이의 적정선을 유지하며 다양한 삶의 모습을 담아내는 공간이 되고자 했다. 우리의 이러한 작은 시도가 공공임대주택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개선하고, 공동주택의 다양한 건축 유형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내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